서수라(西水羅)라는 곳은 웅기에서 서동으로 60리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 당시 조선의 유명한 어항(漁港)이요 러시아·중국·조선의 국경 지역으로, 당시 새롭게 발전하는 가운데 장래에 큰 희망이 있는 곳이었다.
서수라교회(함경북도 경흥군 방면 서수라동)가 설립된 것은, 서수라 지역에 교회가 없다는 소식을 들은 웅기교회 전도회원과 교역자가 특별전도대를 조직하여, 1931년 5월 19일에 그곳에 가서 경성여관에 숙소를 정하고 3일 동안 가가호호에 전도지를 배부하며 열심 전도한 결과로 수십 명의 결심 자를 얻게 되었고 또한 여관주인인 ‘이두석’ 씨가 믿기를 결심하고 예배당 부지 120평을 기부하였다.
때마침 전국 순회 이사 곽재근 목사가 순회차 6월 1일에 웅기에 도착함으로 서수라 전도 상황을 보고하니, 곽 목사는 그곳까지 순회하여 결심자 가정들을 방문하고 예배당 부지를 기부한 이두석 씨를 찾아 치하하였다. 이때 이두석 씨는 예배당을 건축할 때까지 예배드릴 장소로 초가 4간을 무료로 빌려주었다.
웅기교회로 돌아온 곽 목사는 즉시 이사회에 순회 결과를 전하였고, 이사회에서는 이를 웅기교회의 지교회로 인정하고, 7월 1일 성서학원 수양생 조승각을 임시로 서수라교회에 파송하였다.
7월 20일에 감리목사가 순회하고 신자 중 남녀 7인을 임시 직원으로 세우고 교회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직원회에 맡기자, 이때부터 직원들은 책임감 있게 일하기 시작하여 힘과 재정을 아끼지 않고 가옥을 수리하였다.
한 형제는 전등을 기부하여 예배당을 광명한 처소가 되게 하고, 9월 6일에는 경종을 구입하여 달았다. 신자들이 열심히 출석하여 주일마다 100여 명씩 모이게 되었다.
또한 다섯 살 때부터 앉은뱅이 되어 8년 동안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던 아이가 주를 믿기로 결심하고 교회에 출석한 지 불과 1개월 만에 고침을 받고 자유로 교회에 출석하는 신유의 이적이 나타나 모든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서수라교회는 12월 7일∼10일까지 이명직 목사를 청하여 부흥회를 열었는데 성신의 크신 역사로 말미암아 중생 자가 50여 명, 성결 자가 30여 명에 달하였으며 미신자도 조수같이 몰려왔으되 장소 관계로 수용치 못한 것이 큰 유감이었다.
1932년 본부에서 700원의 보조금과 신자들의 헌금 151원 8전, 도합 851원 8전으로 34평의 예배당을 9월 5일에 준공하고 11월 10일 오전 10시에 최석모 목사의 인도로 헌당식을 성대하게 행하였다.
1935년 7월 13일∼17일까지 이정원·이원근·장리초·문기선 전도사를 청하여 대전도회를 하였는데 우중임에도 불구하고 매일 100여 명씩 모여 풍성한 은혜를 받고 새 결심자 30여 명과 새로 자급헌금 작정한 자가 13명이나 되었다.
1938년 3월 25일∼31일까지 김선학 목사의 인도로 1주일간 부흥회를 열었는데 교회 창설 이후 초유의 대성황을 이루어 매일 밤 450명∼650명이 모였으며 새 결심자가 127명이나 되었으며 예배당 수리 헌금이 245원에 달하였다.
1939년 4월, 그동안 유봉운 전도사와 교우들의 전도와 수고로 함경북도 국경 지역에 있는 조산동에 기도소를 설립하여 40여 명씩 모여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예배당 건축을 위해 기도하였다.
11월 22일부터 백만구령운동 및 축호전도 대장 김진문 목사를 청하여 추계부흥대사경회를 하여 측량할 수 없는 큰 은혜를 받아 중생·성결의 은혜를 받은 자가 많았으며 믿지 않는 대중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여 주께 영광을 돌렸다.
서수라성결교회는 1943년 12월 29일 성결교회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당할 때까지 복음을 전하였다.
출처 : 한국성결신문(http://www.kehc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