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원군의 서쪽에는 낭림산맥이 남북으로 뻗어 높은 산과 고개가 솟아있고 남쪽에는 문천군과의 경계를 따라 전탄강이 흐르고 하류에는 넓은 충적평야가 발달하였다.
특히 고원읍(하발면 관덕리)은 동단의 남북으로 함경선이 통과하고, 또한 평원선의 분기점으로 철도와 도로의 교통요지이며 평안도·함경도·강원도의 삼거리와도 같은 드나드는 길목에 위치하였다.
고원성결교회(함경남도 고원군 하발면 관덕리 86)가 개척될 당시 고원군에는 사찰 3개소, 개신교 6개소의 장로교회가 있었으며 신도 수는 120여 명이었다.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는 1932년에 함경남도 고원군에 교회 설립을 결정하고 이를 위해 경성성서학원의 학생인 이류경 형제를 파송하였다.
8월 2일에 임지에 도착한 이류경 형제는 고원읍 도정리 27번지 정도명 씨의 집에 숙소를 정하고 개인전도 및 공중전도 활동을 열심히 하여 고원성결교회가 설립되었다.
1934년 7월 1일부터 5일 동안 아침 일찍 일어나 전도사를 청하여 부흥회를 열었다. 그 결과 일반 신자는 전무후무한 큰 은혜를 받았으며, 그동안 예배당이 없어서 큰 고난을 당하던 중 주님의 축복으로 ‘조히수’라는 형제가 자신의 집을 팔아 고원읍 내에 우수한 큰 집을 사서 산뜻하게 수리하고 또 경종까지 사서 달고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한편 동양선교회의 재정난으로 인한 자급요청이 있자 전도부인을 자급함으로 교회들의 모범이 되었다.
1935년 6월 28일에 경성성서학원을 졸업한 이유경 전도사는 자치 선언과 함께 자급을 작정하였고, 1937년 제1회 연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는다.
이유경 목사의 취임식은 7월 24일 오전 11시에 강송수 목사의 사식으로 거행되었고 오후 3시에는 교회당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1938년 10월에 이류경 목사는 온성교회로 이동하고, 서수라교회 이정활 목사가 고원교회 교역자로 부임한다.
그간 악마의 시험에 시달리다가 새해를 맞으며 신 결심자가 속출하여 열심히 교회 부흥을 위해 기도하던 중 교역자 주택건축을 위해 헌금을 하였는데 헌금이 200여 원에 달하므로 건축을 위한 목재를 구입하였다.
교역자 주택이 없어 어려움이 있던 고원교회는 1939년에 신자들이 분연히 일어나 헌금하여 보기 좋게 반양제주택을 짓고 7월에 입주하였다. 이 일은 남녀 신자들의 큰 노력과 특별히 김명식 집사의 주선과 이만재 형제의 수고가 많았다.
한편 1940년 1월 17일부터 5일 동안 이태수 씨의 인도로 부흥회를 열고 은혜받는 중 장유신자 전체가 크게 새 은혜 받았다.
또한 1939년에 남녀교역자 주택을 건축하고 그 부채가 적지 않아 기도하던 중 여러 숨은 성도들의 다액의 도움을 받아 모든 부채를 어려움 없이 청산하였다.
전도부인이 없어서 기도하던 중 하나님께서 김은겸 전도부인을 보내 주셔서 온 교회가 기쁘게 여겼다.
1941년 4월 9일로 5일간 경성신학교 대강당에서 열린 제1회 북부연회에서 고원교회 이정활 전도사가 목사안수를 받았다. 5월 4일에는 고원교회가 속한 원산구역의 장유년 연합야외예배가 재미있고 은혜가 충만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또한 1940년부터 시작된 ‘원산구역 대사경회’가 1941년에는 고원교회당에서 김창근 목사의 인도로 5월 12일부터 18일까지 대성황 중에 개최되었다.
한편 지방회 전도부에서 파송을 받은 고원교회 이정활 목사는 6월 12일 저녁부터 전도 집회를 인도하는 가운데 결심자 31명을 얻었다. 고원교회는 1943년 12월 29일 성결교회가 일제에 해산당할 때까지 복음을 전했다.
출처 : 한국성결신문(http://www.kehc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