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성결교회 이야기

제목평양상수리성결교회2025-07-12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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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지역 전도 활동의 시작

평양 지역은 조선시대 내내 서북지방(西北地方)으로 불리며 ‘기호지방’(경성, 경기도, 호남)이 주도하는 중앙정치에서 변방으로 여겨져 푸대접받았다. 차별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 교육열이 매우 높았고, 과거에 급제한 사람도 월등하게많았다. 그런데도 중앙 정계 진출이나 고위 관직에는 오를 수 없었다. 이에 따라 평양을 중심으로 한서북지방 사람들은 중앙정치에 대한 불신과 기호지방 사람에 대한 불만이 많았고, 동시에 이는 개항 이후 새로운 문화와 종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초기 선교사들은 조선 정부가 허락한 경성과 경기등 안전한 지역에서 전도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새로운 지역에 선교기지를 개척하려는 계획으로평양을 중심으로 한 서북지방 전도 활동에 착수하였다. 가장 먼저 미국 북감리회 선교부는 1892년 3월 초순 존스(Georg H. Jones, 조원시, 趙元時, 1867~1919) 목사와 의사인 홀(William James Hall, 1860~1894, 허을, 許乙) 박사를 한 팀으로 평양에 보내 전도 활동을 시작하였다. 다음으로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는 1893년 1월 마펫(Samuel Austin Moffett, 마포삼열, 麻布三悅, 1864~1939)을 비롯해 리(Graham Lee, 이길함, 李吉咸, 1861~1916), 스왈른(William. L. Swallen, 소안론, 蘇安論,1865~1954) 등 3명을 평양에 파송하였다. 마펫은 전도 활동을 시작하며 의주에서 만난 한석진(韓錫晋) 을 조사로 삼아 평양 개척의 실무를 맡겼다. 그 결과 1894년 평양에는 김창식(金昌植)을 중심으로 한감리교인과 한석진을 중심으로 한 장로교인의 신앙공동체가 세워졌다.


평양상수리성결교회(平壤上需里聖潔敎會)

성결교회의 서선 지방(조선의 서북지방)의 전도 활동은1925년 평양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평양은 인구가 10만여 명으로 조선 제2의 도시였고 무엇보다 예수교의 도시로 유명하였다. 평양에서는 누구든지 높직한 언덕 위의 예배당을 보았고, 사방팔면(四方八面)에서 울리는 주일의 종소리를 들었다. 인구가 경성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았지만, 평양 시내에는 장로교회와 감리교회, 천주교, 성공회 등의 예배당이 25~26개소나 있었고, 어느 교회든지교인으로 가득했다. 주일에는 상점 대부분이 문을닫고 남녀노유(男女老幼)가 성경책을 끼고 삼삼오오(三三五五) 무리 지어 각처 예배당으로 들어갔다. 이런 광경은 경성의 어디서도 보지 못하는 일이었다.또한, 수십이나 되는 대·중·소학교는 대부분 교회가 운영하는 학교였고 우뚝우뚝 솟은 연통으로 연기를 내는 각종 공장은 거의 예수교인이 운영하는사업장이었다.동양선교회는 1925년 이내에 함경북도 회령과 함경남도 원산, 강원도 강릉, 평안남도 평양, 경상북도 상주, 전라남도 목포 등 여섯 곳에 교회를 설립하기로 하였다. 이 가운데 평양상수리성결교회(평안남도 평양부 상수리 127)를 설립하기 위해 1925년 6월에 이건 전도사를 주임, 김제근 전도사를 부임으로파송하여 평양부 내 ‘상수리’ 적당한 위치에 큼직한 집 한 채를 월세로 얻었다. 하지만 평양의 장로교회나 감리교회에는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미 그교회들은 10만여 원을 들여 건축한 벽돌 양식 교회당에 700~800여 명이 모여 예배드리고 있었다.평양상수리성결교회는 설립 당시에는 ‘평양성결교회’로 불리다 이후 ‘평양제2교회가 설립됨에 따라 ‘평양제1성결교회’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건 전도사와 김제근 전도사는 1925년 8월 26일까지 예배당 수리를 마치고 30일 주일부터 예배드리기 시작하였다. 설립 예배에 참석한 사람은 남녀 22인이었고, 연말에는 주의 특별하신 은총으로 장년48인, 주일학교 학생 70명이 출석하는 교회로 성장하였다.1926년 2월 8일~14일에 청신기도회를 열었는데 그결과로 어느 보통학교(초등학교) 교사의 온 가족 10여 명이 주께로 돌아왔다. 7월 6일~10일 5일간 교회 정원에 천막을 치고 이명직 목사와 최석모 목사가 인도하는 ‘대거전도회‘를 열었다. 매야(每夜) 참석한 청중은 500명~1,000명에 달하였고 결심자는100여 명이나 되었다. 매일 오전 10시에 열린 성별회에서도 성신의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 모든 신자가 많은 은혜를 받았다. 9일 오후 3시에는 능라도강(대동강)에서 5명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10일에는 7명에게 집사임명식을 하였다. 9월 26일~10월 2일에 청신기도회를 개최하여 신자들이 많은 은혜를받는 가운데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크게 애통함으로 용서의 은혜로 인해 평안을 받은 신자들이 기쁨으로 주께 영광을 돌렸다.1928년 4월 22일에는 황재학과 김재곤 두 사람을집사로 세웠다. 5월 27일에는 남녀 11명에게 학습예식을 행하였다. 6월 23일에는 남녀 14인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6월 24일(주일)에는 제2회 성찬식이있어 남녀 41명이 경건하게 참예하였다. 점차 교인이 많아져 100여 명에 달하자, 예배당 장소가 협착하여 주의 응답하심을 받아 대지 94평을 1,800원에매수하고 예배당을 새롭게 건축하였다. 이는 미국시카고에 사는 한 자매가 죽은 동생을 기념하기 위해 헌금한 것이었다.7월 17일부터 부흥회를 준비하며 새벽기도회를 시작하였고, 27일~30일에 이명직 목사를 청하여 부흥회를 열고 많은 은혜를 받는 중 28일에 신축예배당 헌당식을 하고 주께 영광을 돌렸다. 당일에 송기준 씨는 40여 원짜리 경종을, 웃-쓰 목사(선교사)는강대상을, 강신성 자매는 강대상 의자 1개와 시계1개를 기부하였고 그 외에도 신자들이 부속 설비를 위해 250여 원을 헌금하였다. 12월 2일에는 추수감사회로 모여 예배드리는 가운데 신축예배당부채 상환을 위해 70여 원을 헌금하였고, 12월 16일에는 8명의 학습예식과 송기준 씨의 집사 임명식을 하였다.1930년 변남성(邊南星, 1901~1939, 평안남도 용강군 출신) 목사가 담임 교역자로 부임하였다. 테-트 교수는 1932년 12월 8일~1933년 2월 사순 약 2개월간 평양상수리성결교회에 개설된 ‘서부지방 성경학교’에서 교수하였다. 1933년 9월 9일, 교회와 인접한 양말공장의 화제가 교회로 옮겨붙어 변남성 목사의 주택이 전소되었다. 또한, 1933년 7월에는 전도부인의이동과 연관되어 교회 내의 횡설수설과 유언비어로 인해 1934년 초까지 교회에 어려움이 있었다.7월 16일 밤 8시에 평양부 내 5개 성결교회가 평양상수리성결교회에 모여 직원연합회를 조직하였다.1935년 3월 11일~17일에 ‘서부지방회’가 평양상수리성결교회에서 개최되었다. 1936년 1월 21일 오후 7시에는 ‘서부지방 성경학교(4년제) 제1회 졸업식’이 평양상수리성결교회에서 거행되었는데 졸업생은 박정배, 최진신, 박은영 씨였다.


이명직 목사를 중심으로 한조선인 교역자 자치운동

동양선교회는 1921년부터 길보른(Ernest AlbertKilbourne, 1865~1928)을 총리로 파송하여 서울에 주재시키면서 조선인 자문기관인 ‘고문회’를 두었다. 초대 고문으로는 이명직, 이명헌, 뿌릭스 부인(선교사)을 추대하였다. 한편 조선인 교역자들은 1921년부터 매년 수양회 기간을 이용해 정식회의는 아니었지만 ‘교역자 간담회’로 모이기 시작했다. 1924년에는 ‘전국교역자회’를 공식적으로 조직하고 감독제를 폐지하고 ‘이사회’를 두었다. 1929년에는 ‘연회’를 조직하고 ‘제1회 연회’를 개최함으로 국내 교역자들이 주체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게 되었고, 선교사의 통제로부터 자유로운 ‘온전한 자치(全自治)운동’으로 이어졌다. 이 같은 자치운동으로 성결교회는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교회 수와 조선인 교역자의 수가 많이 증가하였고, 그에 따라 조선인교역자의 역할과 책임도 증대되었다. 마침내 1932년 3월 26일 제4회 연회에서 ‘그동안의 선교사 중심의 중앙집권적 정치제도에서 독립한다’는 의미의 ‘자치 선언’을 한다.이 자치운동은 이명직 목사를 중심으로 힘 있게 추진되었고 1933년 4월 12일에는 ‘제1회 총회’를 소집하여 이명직 목사를 총회장으로, 곽재근 목사를부총회장으로 선출하고 총회가 교회통치의 최고회의임을 선언하였다. 선교사는 일반적인 조선인 교역자들과 동등한 자격의 총회 회원으로 참석하게되었고 과거와 같은 절대 권력을 사용할 수 없게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인 교역자와 선교사 간에주도권을 둘러싼 갈등이 심화하였다.1934년 4월 23일에 개회된 ‘제2회 총회’에서도 이명직 목사를 총회장으로 선출하였다. 하지만 동양선교회 총본부에서는 제1회 총회에서 결의한 ‘이사선출권’을 수용하지 않았다. 조선인 교역자의 정치적 자치에 반대하며 자치가 시기상조임을 강조하고 이사회를 장악하여 1935년에 열릴 예정이었던‘제3회 총회’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인 교역자들의 자치와 자립 운동은 계속되었고 1935년 8월 22일에 6개 지방순회목사들과 조선인 이사들이 다시 모여 재차 ‘자치’를 선언하고 ‘우선 남(男)교역자에게 전자급(全自給)을 실시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명직 목사는『활천』편집인과 주간직에서 해임되기 직전인 1935년 8·9월호에〈전자치(全自治)와 우리의 각오〉라는 글을 실었다.이 일의 결과로 이명직, 최석모, 곽재근, 이상철 목사가 9월부로 상무이사에서 해임되었다. 특히 이명직 목사는 ‘이사’뿐 아니라 ‘『활천』편집인’과 ‘중부지방순회목사’직에서도 해임되었다. 이후 새로운『활천』편집인으로 임명된 허인수(Paul. E.. Haines.1891~1960) 선교사는 ‘자치·자립’에 관련된 글이『활천』에 실리지 못하도록 통제하였고 1935년 11월~1936년 말의 거의 매호에 조선인 교역자에 대한악평 섞인 글과 ‘조선인의 자치 노력’을 비판하는논조의 글을 실었다.


변남성 목사의 총회장 당선과 성결교회의 갈등

이 같은 어수선한 상황 가운데 ‘제3회 총회’가 1936년 3월 24일에 개회되었다. 그런데 총회장 선거에서 ‘개혁과 자치를 강조해 온 교역자들’의 지지를받은 서부지방회장 변남성 목사(36세)가 무기명투표를 통해 ‘3대 총회장’으로 선출되는 이변이 일어났다. 이 일은 조선인 교역자 간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던 기득권에 대한 불만과 갈등이 표출된 사건이었으며 자치운동을 주도해 온 이명직 목사와 중앙대의원들에게 충격적인 사건이었다.제1대와 2대 총회장 선출과 같은 선거방식으로 3대 총회장이 선출되었음에도 이명직 목사를 중심으로 한 이사회는 크게 불만을 드러내며 합법적인선거로 총회장에 당선된 변남성 목사를 인정하지않았다. 이전의 임원과 중앙세력이 한데 뭉쳐 선교사들에게 ‘제3회 총회’를 ‘무효화 선언’해 줄 것을요청하고 과거처럼 선교사 중심의 이사회 체제로돌아갈 것을 약속하였다. 선교사들은 이명직 목사의 요청을 수용하고 ‘제3회 총회 무효를 선언’하였다. 이명직 목사는 일순간에 그동안 자신이 주도했던 자치운동의 방향과는 정반대되는 태도를 보인것이다. 즉 정치체제를 다시 환원하여 선교사 중심의 이사회 체계로 만들고 총회를 대신하여 이사회를 최고의 의사결정 기관으로 정한 것이다.또한, 이명직 목사는 선교사들의 직접적인 개입과 영향에서 자립·자치를 주장하며 동양선교회의 본질적인 교회로의 개혁을 원하던 교역자들을‘선교사 반대파’, ‘불순분자’라고 하여 징계하였다.총회장으로 선출된 변남성 목사는 목사직에서 파면되었고 곽재근 목사(목포성결교회)는 비밀누설이라는 죄목으로 6개월 정직 처분을 받았으며 서재철,김광원, 송태용 전도사는 전도사직에서 면직 처분되었다.


성결교회의 첫 분열: 하나님의 교회 분립

이 일은 성결교회 첫 분열 사건이며 ‘하나님의 교회’ 분립을 초래했다. 이명직 목사의 태도와 조처에 반대하는 교역자와 교회 대표자들은 1936년 7월 12일에 평양상수리성결교회에서 모여 ‘하나님의 교회’를 창립하기로 결의하고 선언문을 작성하여 발표하였다.〈하나님의 교회 선언문〉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경륜(經綸)의 중심이오 목적인 유일의 존재이다. 이것을 그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안아 성취(成就)하시나니 저에게 속한 모든 성도들은 다만 그 보이신 성서의 진리 그대로 믿으며 행하는 바가 곧 이 경륜의 실현(實現)으로 되어야하는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 하나님의 성지(聖旨)를 준행하면서 하나님의 교회의 정신을 자(慈)에 선언함.一. 하나님의 교회는 그 명칭을 하나님께서 성서에보이심에 의한 것임.二. 하나님의 교회는 성서 상 원래 단일성(單一性) 존재이매 이 진리대로 모든 성도들이 주안에서 하나이 되어야 할 것을 주장함.三. 하나님의 교회는 신앙개조(信仰個條)를 제정(制定)치 않고 단순히 성서를 신앙의 기준으로 함.四. 하나님의 교회는 정치적 통제기관(統制機關)을두지 않으며 또한 성서 이외에 법규를 세우지 않고 각 개교회가 다만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통치에 직속(直屬)하여 성서를 유일의 정칙(政則)으로 함.五. 하나님의 교회는 각 개교회의 협동을 요하는주의 사업에 대하여는 호상연합(互相聯合)하여 행함.이 같은 내용의 선언문은 급진적 성결운동(사중복음)을 위한 단체인 ‘만국성결연맹의 헌장’ 내용과일치한다.성결교회 분립에 참여한 교회와 교역자는 목포성결교회, 평택성결교회, 인광리성결교회, 청량리성결교회, 창신동성결교회, 홍제원성결교회, 매양성결교회, 사리원성결교회, 평양상수리성결교회, 진남포성결교회, 대두리성결교회, 양시성결교회 등이었고 교역자로는 곽재근, 변남성, 김승만, 오계식, 송태용, 서재철, 김광원, 김정기, 정희열, 이태석, 안형주 등이었다. 결국 1936년 11월 25일~29일에 평양상수리성결교회에서 ‘하나님의 교회 제1회공의회’를 열어 ‘하나님의 교회’를 창립하고 변남성목사를 제1대 총회장으로 선출하였다.하나님의 교회는 한국전쟁 후 1954년 정남수 목사를 중심으로 미국 나사렛 교단과 협력하며 현재의나사렛성결교회가 되었다. 이 일은 사회적으로도적지 않은 반향을 불러일으킨 사건이었다. 당시 일간신문인《조선중앙일보》와《매일신보》에는 ‘하나님의 교회 분립’의 내용을 상세하게 보도하였다. 한편 조선 교역자 자치운동을 주도했던 이명직 목사는 태도를 바꾸어 다시 선교사 편에 섬으로 선교사들의 재신임을 얻어 상무이사로 임명되었고 동시에 해임되었던『활천』편집인(주간)직에 복귀하였다.


평양상수리성결교회의 폐쇄와 재건

동양선교회는 1936년 3월 30일에 변남성 목사를파직하고 박영순 목사를 평양상수리성결교회 교역자로 임명하여 평양상수리성결교회 회복을 위해노력한다. 하지만 결국 8월 25일에 평양상수리성결교회를 폐쇄하고, 1937년 7월 31일에 박영순 목사를 사리원교회 교역자로 파송한다. 해방 이후 평양상수리성결교회가 다시 설립되어 최병률 전도사와 신도 80여 명이 모이고 있음을 이성봉 목사는『활천』, 1946년 8월 15일호에서 ‘서북교회소식’으로 전하고 있다